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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신문 지해수 칼럼] 비운의 예술가를 향한 당신의 연민에 대한, 나의 연민

지해수 칼럼 | 기사입력 2018/06/22 [09:28]

[공감신문 지해수 칼럼] 비운의 예술가를 향한 당신의 연민에 대한, 나의 연민

지해수 칼럼 | 입력 : 2018/06/22 [09:28]

- ‘한 겨울에야 나는 내 안에 여름이 계속 도사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 알베르 까뮈

 


 

 

[공감신문]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라고 시작하는 소설이 있다. 아마 꽤 많은 분들이 이 소설의 제목을 맞추셨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최근 몇 년 사이 이 작품이 유행(?)을 탔기 때문이다, 심지어 고전인데도. 이건 알베르 까뮈作 <이방인>의 첫 구절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방인>을 읽은 후, 까뮈의 생애에 대해 궁금해 한다.

 

도대체 어떤 삶을 살다 갔기에 이런 글을 썼을까? 그는 얼마나 불행한 삶을 살았을까? 이런 글을 쓰기까지... 그는 고통을 이기기 위하여 얼 만큼의 술을 마셨을까? 그는 얼마나 가난했을까? 오- 그는 이런 것들을 예술로 승화시켰구나! 아, 이런 보편적인 감상들이 뭉게뭉게... 그러나 나는 <이방인>을 읽고 이런 한 가지 감상밖에 할 줄 모르는 누군가의 삶이, 까뮈의 삶보다 훨씬 불행하다고 느낀다. 물론 이것은 나의 주관적인 기준에서다.

 

알베르 까뮈 Albert Camus (1913년 11월 7일 - 1960년 1월 4일)

이런 감정-까뮈는 불행했다-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단언컨대, 글을 써본 적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물론 누구나 글을 쓰며 살아간다. 요즘은 문장부호 대신 ‘ㅋ’을 붙이고, ‘ㅎ’을 말줄임표 삼으며 ‘#’ 해시태그로 강조한다. 손 일기를 쓰는 이들도 아직 꽤 있다. 그러나 이런 대부분의 글들은 누군가에게, 혹은 나중에 보여 지기 위하여 쓰이는 성격이 짙다.

 

과연 까뮈는 우리에게 보여 지기 위한 글만 썼을까? 아니다. 그에게 조금만 관심이 있다면 ‘작가 수첩’과 같은 책을 읽으셨을 수도 있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혼자서도, 쓴다. 견디지 못해서 쓸 때도 있는 것이다, 차올라서. 우리가 가끔 술을 마시면 막 노래를 하고 싶을 때가 있지 않은가. 오늘은 꼭- 노래를 하고 들어가야겠다며 노래방에 가서 그날 마음에 들어맞는 노래를 주구장창 할 때가 있다. 그렇게 표출해내는 것- 작가들에겐 그런 도구가 때로는 (또!) 글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마치 사정하듯 참지 못하고 뱉어낸 것들 중, 꽤 괜찮은 작품들도 있다. 그럼 작가는 그것을 발표할 욕심이 생기겠지.

 

모든 창작하는 이들- 그 중에서도 음악이나 미술, 문학 등 흔히 예술이라 불리는 영역에 종사하며 구매력을 가진 이들은 사실 굉장히 축복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자신답게 살면서도 돈을 벌 수 있는 사람이기에.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아니 요즘도 누군가는 ‘왜 요즘 애들은 가사에 돈 자랑을 그렇게 해?’라며 힙합 음악을 욕할 수도 있다. 이미 수년전에 이런 가사들이 꽤 유행이었다. 정말 돈 많은 사람들은 그런 자랑을 안 한다고, 어른들은 말했다. 그러나 십대들이 과연 그러한 어른들의 말에 관심이 있을까. 원래 금수저가 ‘금자랑’을 안하는 것과, 개천에서 용은커녕 구렁이도 기대하기 힘든 요즘에- 스스로 하고 싶은 일로 돈을 벌어 은자랑을 하는 사람이야말로 ‘귀감’이 될 수 있다는 거다.

 

노블리스 오블리쥬? 겸손? 요즘 청년들에게 먹히지 않는 말이다. 노블리스가 되기 어려운데 그래서 ‘어쩌라고’?

 

세계적인 힙합 아티스트이자 아이콘인 Asap Rocky. 그의 아버지는 그가 12살 때 마약 판매 범죄에 연루되어 감옥에 갔었고, 1년 뒤 형이 살해되는 일을 겪었다. =A$AP Rocky - "Wassup" MV 중에서
얼마 전 강남 한복판에 걸렸던 M사의 광고. 그는 영앤리치 young & rich의 표본 같은 느낌을 준다. 개인적으로 뻔한 고급 외제차 광고보다 이 브랜드의 행보가 굉장히 멋져보였다. = Mercedes Benz “Grow Up”캠페인

나는 갈수록 창작하는 사람들이 잘 사는 세상이 올 거라 믿는다. 대신 시스템을 파악해야 하며 머릿속에서 업데이트가 되어야 한다. ‘예술’이 어쩌고저쩌고-라는 핑계를 대는 게으름뱅이들은 제외하고.

 

우리의 삶은 고苦의 연속이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기에 우리는 불행하다고 느낀다. 인정하는 순간, 조금 편안해질 수 있다. 그리고 때론 그것을 이용할 수도 있다.

 

까뮈가 불행했을 거라고? 까뮈는 불행을 느꼈을 때- 혹은 부조리를 뼈저리게 겪으며 그러한 글들을 토해냈을 것이다. 까뮈는 굉장히 많이 썼었다. <시지프의 신화>에서는 인간 삶 부조리의 극치를 보여준다. 우린 그의 글을 읽으며 쓰디 쓴 소주를 들이키려 할지 모른다. 

 

하지만 까뮈는 이 글을 다 쓰고 나서 해방감을 느꼈을지 모른다. 한마디로- 그는 자신의 감정을 소화시켜 싸-지른 것이다. 표현이 좀 격하긴 한데,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그것을 소화시켜서 제대로 싸지르는 것은- 웬만한 사람으로선 해낼 수 없는 일이다. 그 안에는 섬세하고 철저한 본인만의 감상이 있었던 것이다, 고苦에 대한.

 

대부분의 창작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느낀 감정을 토대로 만드는 것이 제일 편하다. 편하다는 것은, 잘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본인이 가장 잘 아는 것을 다시 만드는 거다. 마치 하나님이 자기 모양대로 아담을 만드셨던 것처럼, 어느 재료-(음악가라면 음, 작가라면 비유, 화가라면 선-) 같은 것들로 자기가 가장 잘 아는 감정을 빚어내는 거다. 하나님이 아담을 얼마나 수월하게 빚으셨을까? 오히려 다른 동물들, 꽃, 해, 달 같은 것을 만들기가 어려우셨을 거다. 그래서 예술가들은 이런 아담 하와들을 꾸준히 만들기 위하여 섬세하게 오감을 일깨우고, 또 느껴야 한다. 안타깝게도 우린 하나님이 아니니, 우리 창조물들은 저들끼리 아이들을 계속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알았던 작가들은 자신이 느낀 것들을 마구 써-질러 갔다. 그렇게 해소감을 느꼈다. 자신의 ‘아이’들이 자기 삶을 살도록 놓아줄 수 있었다. 물론 잉태와 산통을 겪었겠지만. 그런 것들이 훈련이 되어졌기에- 오히려 자기 삶을 마구 위태롭게 만들 용기를 가질 수 있었는지 모른다. 해소할 힘이 있기 때문에, 글을 쓰면 되니까, 종이 위에다 해소하면 되니까.

 

영화<서편제>에서 딸의 눈을 일부러 멀게 한 아버지가, ‘한을 담는 소리가 아니라, 한을 넘어서는 소리를 혀라-’고 한다. 그들은 어떤 것-들을 넘어섰기에 쓸 수 있었고, 부를 수 있었고, 만들 수 있었다. 물론 다시 그것들을 접할 때엔 당시의 향수가 되살아나더라도 말이다.

 

그러니 까뮈의 글, 고흐의 그림, 베토벤의 음악을 듣고 그들 삶이 ‘불쌍했구나’라고 느낄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베토벤은 다른 의미에서 안타깝긴 하다, 알고 보니 납중독을 앓았었다는 사실...) 그들은 이겨내는 방법을 알고 있었으며, 극복 자체가- 그들에게 부와 명예, 또 다른 것을 향한 호기심과 사랑, 세기를 넘어서는 영광을 부여하였으니.

 

위에서 언급한 까뮈만 하더라도- 대부분 우리들의 삶보다 훨씬 나았을지도 모른다. 일단 그의 외모는 제임스 딘을 연상시킬 만큼 상당히 잘생겼었다. 아니, 얼굴만 잘생긴 게 아니라 분위기가 잘생겼다, 분위기 미남이다. 게다가 어찌나 능수능란한 사람이었던 지! 작가들이 얌전할 거라고? 전혀. (헤밍웨이도 굉장한 미남이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는 까뮈를 이야기하며, ‘그가 여자에게 말을 걸 때... 그들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춤을 능숙하게 추면서 여자들의 허리를 잡고 조일 때면, 거기에서 느껴지는 지중해 남성의 위풍당당함에 감탄했다.’라고 했다. 엄청난 바람둥이로, 주변에는 늘 여자가 끊이질 않았다.

 

= 알베르 까뮈와 그의 친구들

물론 가난했던 그의 출신과 달리, 주변 사교계의 명사들은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들과 격없이 어울릴 만큼- 아니 더욱 환영받는 사람이었다. 주목을 받고 있었다. 그의 삶이 불행해 보이는가? 아니, 나는 그의 삶이 꽤 괜찮아 보이는데.

 

그러니 우리도 창작해야 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온전히 싸-지를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어떠한 방식이든 괜찮다.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불러도 되고, 일기를 쓰거나 시를 써도 된다. 그림을 그리는 것도 방법이다. 스스로의 감정을 해소할 창구를 찾아 제대로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예술을 대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해보았기에, 만들어 보았기에, 자기만의 감정으로 느낄 수 있게 된다. 이렇게 깨워진 오감은 삶에서 마주할 여러 순간에서, ‘나만의 사는 방식’을 가지게 만든다.

 

그것은 대단히 멋지고 매순간이 새로운 일이라서, 나의 소중한 독자님들께 꼭 권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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