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너 배너 배너 배너
[공감신문 지해수 칼럼] 나의 명함은 과연 '나'다운가요?
지해수 칼럼 기자
수정일 2018-07-20 18:44
등록일 2018-07-20 09:51

[공감신문] 누군가를 처음 만나게 되면, 흔히 '무슨 일 하세요?'라고 묻곤 한다. 어쩌면 실례가 될 수 있는 질문이라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사람이 하는 일이 그 사람의 성향을 잘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떤 직업군에 몇 년 이상 종사해본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게 느낀다. 특정 분야의 사람들끼리 모이면 흔히 '이 바닥'이라는 표현으로 성향을 이야기하곤 하니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중에서

나는 글을 쓰며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을 만나왔다. 여러 주제에 글을 쓰려면,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의 조언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나는 나의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최대한 사실에 입각한- 신빙성 있는 정보를 근거로 한 내용을 전달하고자 한다. 때문에, 내 능력 안에서 최대한 그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조언을 구하려 한다. 대부분은 정말, '그 바닥' 사람다운 사람들이었다.

한번은 내가 어느 특정 분야에 대한 글을 쓰려는데, 그 분야에 내 고등학교 동창이 종사하는 것이 생각났다. 같은 반이었던 그를 우연히 몇 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나에게 나중에 밥이나 먹자며 명함을 줬던 걸 용케 찾아낸 거다. 그걸 기억하고 있던 이유는, 내가 알던 그와 상당히 어울리지 않는 명함 때문. 내가 아는 그는 굉장히 개구쟁이였다. 늘 화이팅이 넘치고 가만있질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런데 그가 하는 일은 솔직히 그의 성격에 비해 좀 지루하고 단조로운 편이었다.(이 때문에 그 '분야'에 대해 쓸 수 없음을 이해해 주시라.)

'아직도 그는 그 일을 하고 있을까?'

명함을 받고 1년 반이 지나도록 연락을 한 적이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 그와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니라 따로 만나 밥을 먹는 건 정말 어색할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아이도 괜히 인사치레로 명함을 준 것 같았다. 진짜 연락할 사이라면 휴대폰 번호를 그 자리에서 서로 바로 교환하지 않았을까. 심지어 나는 명함도 없으니, 내 연락처를 받아가지도 않은 걸.

나의 호기심은, 그가 아직도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그 옷을 입고 있을까-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의 성격이 변했을 수도 있겠지만 문득 너무도 궁금해져 연락을 해버렸다. 그는 뜬금없는 내 연락에 당황해서는 더욱 매너 있게 굴었다. 한마디로, 친구가 아닌 진짜 처음 보는 사람에게 하듯 적절한 매너를 선보였다는 것이다. 아주 어색하게도. 그래서 나는 그에게 진짜 궁금했던 것을 질문할 수 있었다. 네가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하느냐-고 따질 것처럼 친근하지 않았으니까.

'너, 아직도 그 일해? 나 글 쓰는데 궁금한 게 있어서.'

'아니, 너 보고 얼마 안 있다가 그만둔 거 같아. 우리가 본 게 봄 맞지? 아마 그럴 거야.'

역시나 내 예상이 맞았다. 갑자기 그 일은 어떻게 왜, 하게 된 거냐고, 내가 아는 너는 정말 활발한 아이였는데-라면서 친구처럼 굴고 싶어졌다. 내가 아는 그 아이에 대해 마구 아는 척을 하고 싶어졌다. 목까지 차오른 호기심을, 그 아이가 차분하게 내치며 말했다.

'너 글 쓴다고 들었던 거 같네. 뭔가 안 어울리면서도 어울린다. 근데 궁금한 게 뭔데? 그래도 내가 아는 한에서는 대답해 줄 수 있어.'

조금 당황한 나는 그제야 원래 내가 궁금하던 것에 대해 질문을 했고, 이후에 그와 연락한 적이 없다. 처음에는 문자를 주고받다가 통화를 했었는데, 마지막에 그는 활발했던- 내가 아는 모습 그대로였다.

'너랑 통화하니까 진짜 고등학교 때 같다, 야.'

그 아이는 그렇게 말했다. 그는 나와 통화해서 고등학교 때처럼 활기차진 게 아니라 그때도 그러한 사람이었을 거다. 우린 고등학교 때 진짜 그렇게 친하지 않았었으니까.

=<신데렐라>중에서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직업은 어떠한 의미를 가질까. ‘무얼 먹고 살 것인가’보다는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더 많은 것이 바로 현대인들의 삶이다. 즉, 나는 어떠한 스타일-로 살 것인지 삶을 스타일링 한다. 과연 이것은 여유 있는 자들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아마 보편적으로 자기 삶의 모습을 한번쯤은 그려볼 여유를 가질 때가 있다.

이전에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보면, 집안 가장인 오빠를 공부시키기 위하여 불철주야 일하는 여공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오빠가 공부를 잘하든 말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장남은 집안의 기둥이었기 때문에, 그녀들의 희생은 마치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다. 이들에게 삶을 ‘스타일링’하라는 건 말이 안 된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 오늘날 역시 투쟁의 연속일지라도 그녀들과는 다르지 않은가.

영화 <구로아리랑>(1989)중에서

또 어느 오랜 과거의 ‘천부직업설’처럼 평생 직업을 고민하는 것도 좀 철 지난 이야기란 생각이 든다. 홀로 투쟁하고 저 스스로 먼저 고용하는 예술가가 아닌 이상, 누가 평생 써 주리라 보장할 수 있단 말인가. ‘평생 이 회사에 뼈를 묻겠다’고 말한 들 그 회사가 그리 해줄 것인가. 우리는 노후에 대비하고 빠른 시대 변화에 대응하기 위하여 한 두 차례 직업을 바꿀지 모른다. 이때 중요한 것은, 본인의 성향을 잘 파악하는 것이다.

나는 가끔 청소년들을 만나 강의를 하곤 하는데, 그들에게 ‘넌 무얼 좋아하니?’ ‘평생 무얼하며 살고 싶니? 그걸 찾아내야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건 나에게도 어려운 고민이다. 더 중요한 것은, ‘넌 어떤 성향의 사람이니?’라는 질문이다.

난 어린 시절부터 좀 게으른 편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일관성이 없었다. 어느 날은 굉장히 학업 성취도가 높아서 열 몇 시간을 책상에 앉을 수 있었지만, 또 어떤 날은 그럴 수 없었다. 단체 생활보다 혼자서 하는 업무가 더욱 능률이 좋았다. 이렇게 성실하지 못하고 협동심이 부족하지만... 한 가지 나의 장점이라면 스스로 컨트롤이 어느 정도 된다는 점(아예 게을러지진 않는다)과- 적응력이 빠르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불규칙적인 수입도 견딜 수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난 그런 성향의 직업을 가지겠노라, 생각했다. 지금도 글을 꾸준히 쓰면서 여러 가지 재미있는 개인 콘텐츠를 만드는 중인데, 나는 나의 사용 매뉴얼을 잘 아는 편이기에 그런 콘텐츠를 만드는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피노키오>중에서

청소년들은 장래 계획에 있어 부모님의 의견을 따르려는 경향이 크다. 당연하다. 부모님은 자식을 사랑한다는 전제 하에 정말 도움 될 이야기만 하려고 하실 테니. 그러나 그게 함정이 될 수 있다. 사랑에 빠진 남녀는 서로에게 콩깍지가 씌어서 좋은 면만 본다. 부모님은 평생, 자식에게 콩깍지가 씌어있다. 그러니 어찌 자식을 객관적으로, 바로, 단점을 고스란히 볼 수 있을까.

비단 청소년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의 명함이 과연 나다운가? 이것은 나를 행복하게 하고, 나다운 삶을 사게 하는 직업인가? 내 인생에 어쩌면- 터닝 포인트가 될 오늘, 혹은 내일이라도 이것을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미래의 나에게 최소한, 미안한 내가 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공감신문 알쓸다정] 등산족 다모여! 서울 등산하기 좋은 산(山) 소개
[공감신문 알쓸다정] 2020 장마철 다가온다! 장마철 에티켓 5가지 소개
[공감신문 알쓸다정] 코로나19 속 해수욕장 안전하게 즐기는 방법
[공감신문 박재호 칼럼] 속수무책 미래통합당, 외교⋅통일에서 생존의 길 보인다
[공감신문 교양공감]내가 참석한 나의 장례식…대학로 연극 '웃픈 3일'
[공감신문 강란희 칼럼] “밴 업계, 벼랑 끝에 서다.⓶”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