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답은 이미 그 물음 속에 있다. <환오>중에서’

[공감신문] 어떤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느냐는 대단히 중요한 질문이다. 해가 뜨고 해가 지고- 모두가 회복을 위하여 밤의 시간을 보낸다. 이렇게 시간은 매순간 왔다가, 흩어진다. 내가 지금을 어떻게 살고 있는 가- 하는 문제는 곧 나의 삶을 말해준다. 내가 무엇을 욕망하고 또 따르고 실행하는 지 보면 알 수 있다. 말로만 행하는 것은 지저귀는 것,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그러니 우리는 매순간 그 시간의 끝에서 물어보아야 한다.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Superman> by Katherine Bradford

그런데 이 질문은 중요하지만 대단한 것은 아니다. 엄청난 인생의 계획을 세우는 게 아니다. 어쩌면 인생에서 ‘계획’을 세운다는 것 자체가 오만이라 생각된다. 인생을 어떻게 감히, 계획대로 살 수 있을까? 그저, 목표하고 소망할 뿐.

인생은 프로젝트처럼 이렇게 하겠다, 고 시작하는 것도 아니다. 지금도 저물어가는 시간의 끝을 잡고 물어보자는 거다. 내가 건강해지기로 결심했다면 케이크 대신 과일을 먹겠다고 하는 것- 그건 과일의 효능에 대한 믿음이 있는 것이고, 케이크와 과일의 차이를 인정하는 거다. 그런 물음을 지속적으로 할 뿐이다. 다만,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여유를 가지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말하면서 어떻게 하면 행복을 찾을 수 있을지, 아니 앞서 행복이란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는다. 부자가 된다면, 내가 좋아하는 저 애가 나보다 날 더 좋아해주면, 세상 모두가 나를 부러워하고 앞에서 굽신 거린다면- 정말 행복해질까.

그런 믿음은 어디에서 온 걸까? 우리가 그런 경험들을 거의 겪어본 적이 없는데, 도대체 왜 환상에 가까운 믿음을 욕망하며 고통 받고 있는 걸까. 내 주변 대부분은 건물주가 되어 본 적이 없는데, 건물주가 되면 행복할 거라고 말한다. 좋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건물을 가진 사람을 보고 막연히 더 나은 삶을 사는 구나-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그건 그 사람 인생을 제 멋대로 평가하는 오만이다.

나는 어떤 남자를 좋아했었다. 그 사람의 마음은 내 마음과 같지 않았다. 처음 나는 그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하면 깊어지게 할 수 있을까, 고민했었다. 하지만 곧 그게 아무런 소용이 없는 짓임을 알았다. 오히려 중요한 건 내 마음이다.

깊은 밤이면 혼자서 그 사람과 함께하는 나를 상상했었다. 그 사람은 내 상상과 같은 모습으로 연애할까? 그렇지 않을지 모르지. 그렇다면 나는 그 사람을 온전히, 그 모습 그대로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아니다. 당신을 좋아하는데 자꾸만 기대가 생긴다-고 해야 한다. 그 기대는 점점 ‘나의 것’이 되어간다. 우리가 연인이었다면, 그는 나에게 ‘이번 주 금요일’, ‘주말에 볼 영화’, ‘제주도에서의 여름휴가’같이 명확한 것들을 제시했을 텐데- 우리 사이는 그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의 마음은 허튼 것들을 쫓는다.

artwork by Emilie Stark-Menneg

이전에 종교들은 필요에 의해 생겨났다. 생존과 너무도 큰 연관이 있었다. 신체적으로 미약하기 그지없는 인간들이 서로 공동체가 되기 위하여 ‘신’이라는 존재를 둔 것이다. 그로 인해 서로 나쁜 마음이 생겨도 참고, 어떠한 두려움으로 똘똘 뭉치기도 했었다. 우리는 한 형제-라 믿으며 공통점을 찾아내었다. 사실 그건 이전에 생겨난 양식과 문화였고 또 발전시키며 적응해온 것이다. 그것들은 후대의 자손들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기도- 또 신화 같은 신화를 만들어 그 안에 인간상을 녹여 학자들을 감동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종교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은 너무도 대단한 것이어서, 십자군 전쟁 당시 어떤 이들은 가족의 전 재산을 팔아 참전하기도 했었다. 그것을 믿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합리적인 동물이라는 인간들은 그걸 믿어왔다.

그러나 그 믿음이란 시간이 지나고 보면 깨어지기도 하고, 때론 학습되어진 것임이 드러날 때가 있다. 단적인 예로, 내가 고등학교 때 몸짱 연예인들로 인하여 요가 열풍이 불었었다. 목사님은 고등부 예배에서 요가를 하면 안 된다고 했다. 그건 십계명에 어긋나는 거랬다. 태양 숭배 자세-같은 것이 다른 신을 섬기는 행위라고 했다. 하지만 요가가 이렇게 세계적으로 전파되는 데에 큰 몫을 한 건 YMCA, 그러니까 기독교 청년회였다. 이들이 전하는 요가는 건강을 위한 하나의 생활양식이었다. 과거로부터 온 것들 중에 종교적 색채가 없는 것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다 문화에서 온 것이고- 또 그 문화들 안엔 종교가 자리 잡고 있다.

우리가 자본의 힘을 맹신하는 것 역시 대단히 그러해 보인다. 이전에 조선이 개국되어 질 때, 태조 이성계는 불교를 탄압했었다. 그는 유교를 국교로 삼았는데, 그러면서 남과 여를 확실히 분리하였다. 집의 건축 양식들도 바뀌어서 여자들이 외출하기 쉽지 않은 구조가 되었다. 자유로운 연애를 하던 이전과 달리, 여자들은 자신의 얼굴을 제대로 드러내고 다니지도 못하게 되었다.

이들의 마음을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돈이 없어 데이트를 취소해 본 사람이라면 알 거다. 수학여행 때 입을 옷이 없어 아르바이트를 해 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거다. 서울 어느 초등학교 엄마들은 방과 후 아이를 데리러 갈 때, 우버를 이용한다고 한다. 아이들끼리 ‘너네 엄마 차 뭐야?’하고 물으며 평가하기 때문에. 마치 오늘날 자본은, 그러한 것이다. 가난은 너울과도 같다. 스스로 부끄러워하며- 저 뒤로 숨어 은둔하게 만드는 강력한, 힘.

신윤복,<연소답청> 풍속도 화첩에서

돈은 중요하다. 돈이 없으면 불행해지기 쉽다. 하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고민할 때 돈만을 욕망하는 것이 안타깝다. 다른 가치들도 행복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요즘 나는 불교에 관심이 많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무소유’의 삶을 따라보겠다는 건 아니다. 어차피 그러지도 못할 거다. 하지만 단 하나, 불교의 성격 중에 꼭 마음에 드는 게 있는데- 바로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거다.

불교에선 인간이 곧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성불 하십시오- 해탈하라는 것이다. 부처가 되라 하는 것이다. 어떠한 율법 같은 것보다 자기 마음 수양에 집중하길 강조한다. 그들은 어느 율법에 멈춰있는 것이 아니고, 어느 스승의 가르침에 제자는 또 다른 깨달음을 얻는다. 그러니 계속-나아간다. 누가 어떠한 깨달음을 얻어 열반에 오를지 아무도 모른다.

부처님을 믿는다-는 느낌으로 불교에 관심을 갖는 다기 보다, 이러한 삶의 양식이 우리에게 굉장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린 매 순간 어떻게 살아야한다고 강요받기 때문이다. 해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고 알아야할 것이 쌓여있다. 그런데 그걸 하고나면 정말 우리는 행복해질까? 남들과 동등해질까? 남들과 동등해지면, 행복한 걸까.

우리를 한 군데에 모으는 것이 종교의 성격이었다면, 불교는 조금 색깔이 다른 것 같다. 초기의 소승 불교는 개인의 열반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나의 카르마를 아는 것- 그리고 윤회하는 거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할 때에는 대승불교든, 소승불교든 이런 불교적인 관념들이 대단히 방해되었을 것이다.

지금은 ‘돈’이외에 그 무엇도- 우리를 한 데 모아줄 수 없다. 박정희처럼 ‘잘 먹고 잘 살게 해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난다고 이전처럼 노동하지 않을 것이며, 그렇게 단순히 먹고사는 문제를 고민하던 시대는 이전에 지났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더욱 빈곤해졌다. 때론 희망이 없어 남을 미워하기도 한다. 그러니 마치 진리를 끝없이 탐구하듯- 더 많은 돈을 욕망할 수밖에.

artwork by Emilie Stark-Menneg

그것엔 분명 희생이 따른다. 때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이러한 희생을 충분히 감내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떳떳한 나를 자랑스러워하기에, 또 그렇게 벌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럴 때에 한번쯤, 멈춰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이 돈을 여기에 쓰는 것이 과연- 행복할까? 하고. 삶을 결정하는 것은 사실, 그런 질문에 대한 자신의 솔직한 행동일 뿐이다. 사랑하게 될, 사람을 만난다면- 묻고 싶다. 당신은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하냐고. 그리고 내가 그걸 하는 그 사람의 모습을 함께 행복하게 바라봐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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