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지해수 칼럼니스트=기독교인들에게 이번 주일은 좀 특별하다. 예수가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했다던 ‘부활절’이다. 예수의 부활- 이는 기독교가 전세계적인 종교가 되는 데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건 중 하나다. ‘부활’이라니...!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주장할 수 있는, 증거로 제시할 만한 희대의 일화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부활절에 계란을 나누는가? 이 유래에 대해서는 사실 기독교적 입장 외에도 여러 설說이 많다. 부활절(easter)의 어원이 봄의 여신을 뜻하는 에오스트레(Eostre)에서 왔으며, 유럽에서 봄을 기다리며 계란을 나누던 풍습이 원래부터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Resurrection of Christ> Giovanni Bellini, 1475-9, Staatliche Museen 소장

사실 난 신의 존재를 믿지만, 누군가에게 내가 믿는 신을 강요할 생각은 없다. 신께서, ‘그것이 네가 해야 할 일이다’라고 말하신다할지라도 일단 한번쯤은 고민해볼 거다. 신이 나에게 경험하게 해준 일들이, 그것의 증거가 되어보이진 않기 때문. 그러나 한 가지, 나는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데에 일말의 도움이 되어야한다는 것은 안다. 조금 우스꽝스럽게 들릴 지도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그런 사명감이 있다.

세상사람 모두가 그래야하는 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가진 여러 가지 재능, 그리고 나에게 일어났던 몇 가지 우연들이 그런 생각으로 이끌었다. 그건 대단한 일들을 통해서만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어떤 식으로든 변할 수 있는 무언가를(그 결과는 우리가 생각하는 몇 가지, 혹은 그 이상일 수 있다),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가도록 힘을 주는 것- 그것도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행위다.

내가 가진 사명감에 대한 증명이란, 내가 이런 생각을 할 줄 안다는 것- 그리고 먹고 사는 게 바쁜 와중에도 이런 생각을 떨칠 수 없다는 심경들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나는 남들보다 너무도 나약하지만, 또 어떤 면에서는 강하다.

나는 나약하기에, 남들에게 큰 상처를 줄 수 있다. 실망시켜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내가 의도치 않았으나 누군가에게 기대를 갖게 할 수 있고, 또 그것들을 보란듯이 좌절시켜버리고 말 거다. 사랑에 빠지고, 실수하고, 이불 킥을 하고, 좌절하고, 또 그런 상처들로... 누군가에게 분풀이를 할지 모른다. 그리고 가만히, 지난날을 돌이켜보니 나를 아프게 했던 사람들이 모두들 그랬던 것 같다.

그들 중엔 사랑에 상처받은 이들이 많았다. 남녀 간의 사랑은 물론이거니와, 진심을 다했던 친구- 또는 가족에게 상처받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에게 상처 준 이가 나빴다는 사실을 끝까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지도 모르겠다. 증오가 큰다는 건 그만큼 사랑도 컸다는 이야기일 테니. 그래서 이들은 ‘사랑했던 이’들과 같아지고 싶었을 수도 있다. 자신도 똑같은 행동을 하면, 자신에게 상처준 이를 용서하기 더욱 쉬워질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의도치 않게(자신도 모르게) 제 3의 인물에게 같은 행동을 할 때도 있다.

러시아의 황제였던 이반은 자신이 불행한 삶을 산다고 느꼈고 의심이 많았다. 그는 분노에 차- 아들을 쇠망치로 내려쳤다. 그림 속에 그려진 그의 모습은 후회 가득한 표정으로 아들을 안고 흐느껴 울고 있다. = <Ivan the Terrible and His Young Son Ivan> Ilya Repin 1885

하지만 결국 나중에 돌이켜보면 스스로 이 짐을 다 짊어져야만 하는 상황이 오고야만다. 얼마 전 ‘용서 명상’이라는 걸 했었다. 20분짜리 명상인데, 오늘 낮까지 한 네 번 정도 이 테마의 명상을 진행했다. 이 명상은, 나 스스로에 대한 용서에 관한 것이다. 내가 나를 포기하려 들고,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그런 내 마음에다가 ‘나는 그 사실을 안다’고 인정하는 거다.

별게 아닌 것 같지만, 별게 아닌 게 아니었다. 한 차례 했을 때 오히려 꺼림칙한 기분이 들어 한번 더 해야만 했다. 그리고 네 번의 용서명상을 마친 후, 이 봄에 굉장히 잘 어울리는 명상이란 생각이 들어 여러분께 권유하고 싶어진 거다.

부활절은 새로운 탄생을 의미한다. 봄은 새로운 시작임이 분명하다. 만물이 다시금 태어난다. 그 자리에서 죽어갔던- 어떠한 생명 위에 다시 나온다. 추운 겨울 내내 꽁꽁 얼어있던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곧- 부처님 오신 날이 된다. 부처님은 우리에게 삶 자체를, 세계 안에서의 ‘나’와 ‘만물’을 직관적이고도 정확한 눈으로 바라보게 하는 지혜를 가르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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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더욱 복잡해질 것이며- 우리가 가야하는 길은 더욱 험난해 질지도. 나는 이럴 때일수록 우리에게 종교 문화들이 주는 회복의 힘을 조금 빌려다 쓰길 제안하고 싶다. 물론 세상에는 ‘종교’를 도구삼아 다른 이를 이용하거나 피해주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의 종교관은 대부분 자극적이다. 그런 자극적인 종교에 심취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인류들을 회복시켰던 종교들의 긍정적 문화들을 통하여 힘을 얻자는 얘기다.

기독교 방송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하시던 사건부터 부활에 이르기까지의 기록을 들었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나는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이고는 크게 놀라고- 또한 두려움도 느꼈다. 어릴 때엔 이것이 두렵지 않게 느껴졌었다. 그냥 예수에 대한 막연한 생각이 있었기에 무섭지 않았던 것이고, 그래도 30년을 살아오다보니 ‘진짜 그런 일이 있었을까?’를 생각하고 상상하니 놀랄 수밖에 없던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도 이처럼, 생경하게 다가왔다. 우리가 이미 겪은 일들도 마찬가지다. ‘난 당시에 그이의 말에 상처 받았고, 분명 그는 잘못했어.’

마음속 깊이 들여다보면, 나를 짓누르는 문제나 고통, 스트레스들은 생각보다 아주 오래 전 사건에서 기인한 것들이 많더라. 용기를 내어 그것들을 다시 바라보는 건 어떨까? 내가 성경책에서 숱하게 읽었던 예수의 부활이 누군가의 목소리로 인하여- 또는 새로운 장소였던지라 무지 낯설게 다가왔듯이, 나와 당신의 사건도 그러할 것이다.

그리고 그 사건을 다시 봐야하는 이유는, 그 때와 다른 우리를 현재도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시 보아야한다. 이전의 시력으로 맞춘 안경으로 그 사건을 바라보아선 안 된다.

겨울이면 가습기 여름이면 제습기를 틀고, 아니 봄뿐만 아니라 겨울에도 황사보다 심한 미세먼지가 가득한 이 시점에 살며- 나는 종교들을 통해 봄의 새로움을 인식하는 중이다. ‘부활’의 테마를 얻은 나는 다시 새로워질 나를 위한 습관들을 생각해냈다. 혹시 당신에게 봄이 조금 막연하다면, 이처럼 종교들의 문화를, 또 성자들의 아름다운 말들을 권유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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