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지해수 칼럼니스트=나는 스무 살 때까지 할머니 손에 자랐는데, 그녀는 매우 억척스러운 사람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가난했고, 그녀 역시 그러했었다. 나중에 성공한 자식들이 밍크코트를 사줘도 20년 된 오리털 잠바를 입고 다니셨고, 다리가 아프다고 입이 닳도록 이야기하시면서도 마을버스를 타고 다니셨다. 할머니는 그렇게 몇 십 년을 사셨던 거다. 그러니 ‘엄마, 제발 택시타고 다니셔!’라는 고모 잔소리를 들을 리 만무해보였다. 

할머니는 천원, 이천 원씩을 모아 나중에 나에게 1500만원이 든 통장을 주셨었다. 티끌을 모아서- 천만 원이 넘는 게 신기했다. 반대로 아빠는 몇 천 만 원짜리 카메라 렌즈를 뚝딱 사는 기분파다. 나도 기분 따라 돈 쓰는 건 아빠 닮았지만, 할머니의 교육(?)덕에 왠지 작은 거에 인색한 편이기도 했다. 

필자 그림

특히 남을 위하여 써야 되는 순간에 많이 망설였었다. 왜냐하면 20대의 난, 정말 돈이 너무 없었기 때문에. 지금도 많은 건 아니지만, 스무 살부터 경제적으로나 생활면에서 독립을 했던 나는- 진짜 돈이 너무 없었다. 갓 스무 살이었던 난, 옷도 사 입고 싶고, 배우고 싶은 것도 많았다. 데이트를 하려해도 돈이 들었다. 거의 스무 살부터 한 번도 일을 쉬지 않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색할 수밖에 없던 순간들이 많았었다. 

이제는 그렇지는 않다. 동생들에게 술과 밥을 사줄 수 있게 되었고, 내가 입고 싶은 옷도 사 입을 수 있게 되었다. 열심히 살았으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내가 열심히 하는 것보다 나의 일이 더 잘되어가고 있음을 안다. 운이고, 나의 재능이다. 단순히 ‘글 쓰는 것’만이 재능이 아니다. 사람을 모이게 하고, 누군가의 의도를 간파하고, 위험할 수 있는 순간들-을 알아서 잘 피해갔다. 이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져서 지금을 만들고 있음을, 피부로 느끼게 된 건 아마 작년 연말쯤부터였다. 그래서 난 요즘 거의 매일 기부를 하고 있다. 

사실 내가 기부하는 금액은 정말 ‘커피 한잔’값이다. 몇 억씩 기부하시는 분들도 많다. 자랑의 목적이라면 너무 터무니없는 돈을 내고 있으며, 그런 목적의 글이 아님을 알아주셨으면 한다. SNS에도 한번 이야기한 적이 있었고, 나는 이 활동이 매우 추천할만해서 여러분께 소개해드리고 싶은 거다. 커피한잔보다 오래가는 모닝기부의 향기를!

난 나에게 따르는 운과 재능, 좋은 사람 등 모든 것이 내가 어느 정도 잘나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내 능력의 결과는 아니다. 몇 주 전, 몇 년 만에 외할머니를 찾아뵈었다. 외할머니를 뵐 수 없었던 가정사가 있었다. 그런데 할머니는 나에게 사랑한다며, 매일 날 위해 기도했다고 하셨다. 나의 안락함, 혹은 내가 수많은 회식이나 술자리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 아무 탈 없이 무사히 내일을 살 수 있던 것- 그녀의 기도 덕이었는지 모른다.

아빠야말로 기부를 많이 한다. 아빠는 경제적으로 풍족하시진 않지만, 작품을 내놓아 기부하시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셔서 작년-재작년에 걸쳐 약 4,500만원 상당- 타인을 도우신 걸로 알고 있다. 그런 아빠의 선행을 아는 어느 절대자가, 나에게 재능을 주시고 있는 거다. 자기 할 일을 누군가 나눠서 해주니깐! 그 분이 하느님이던, 예수님이던, 부처님이던, 알라 신이던 어쨌든 그런 이는 분명 존재한다고 난 믿는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직관력이 있어야한다고 믿는다. 직관력이라는 건 어찌 보면 영적인 느낌이 강하다. 매우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 살고 있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더욱 적극적으로 느끼려해야한다. 우리가 이 시간에도 쓰고 있는 wifi역시 눈에 보이지 않잖아?

얼마 전 겨우 서른 번째 생일을 지났지만, 꼰대같이 그냥 말하겠다. 세상은 공평하다. 그렇기에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고, 나쁜 짓을 하면 벌을 받는다. 어른들 말씀이 맞다. 꼭 ‘그 사람’한 테서가 아니더라도 어디에서든 그 결과를 받게 되어있다. 단조롭지 않은 삶을 사는 주변 사람들의 삶을 통해 간접적으로 느꼈다. 그러니 사실 나는 이기심으로 기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를 위해, 남을 돕는다.

내가 기부하는 방식은 이러하다. 기부 관련 사이트에 접속해서 다양한 기부펀딩을 구경한다. 그리고 그날, 혹은 내가 전날 하루를 살며 가장 감사했던 분야에 기부한다. 이를테면 가족들과 좋은 시간을 보냈을 때는 가정폭력으로 피해를 입고 있는 가정에 기부한다. 혹은 함께 고민해야할 문제들이 있는 경우, 그것을 홍보하는 환경 사업에 기부한다. 지금 내 글처럼 이렇게 기부문화를 조장(?)아닌 조장하는 사업들 말이다.

하지만 나의 커피 한잔들은 최종적으로 거의 동물과 환경, 지구 생태계를 위하는 곳에 닿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기심 때문이니까! 

< The earth, OneLOVE>, 필자 작품

인간과 식물 중 누가 더 직관적일까? 인간과 산양 중 누가 더 직관력이 뛰어날까. 당연히 식물, 당연히 산양이다. 나는 휘어진 시공간이라는 이 지구에서 저 먼 곳에 사는 거북이가, ‘서울 용산구에 사는 지해수라는 여자가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는데 5천원을 냈구나’알거라고 생각한다. 아니, 그렇게 믿는다. 반면 서울의 아무개 씨는 내가 응원 댓글을 달지 않는 이상 모를 수 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직관적인 곳에 지갑이 열리게 되더라. 

그래서 나는 돈을 많이 벌면 커피 한잔이 아니라 매일 피자 한판을 기부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2년 안에 꼭 그렇게 될 거다. 그 때는 더 다양한 곳에 기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모든 것은 고통스럽다고 말씀하신 부처님.=pixabay, cc0 creative commons

삶은 당연히 고통의 연속이다. ‘난 왜 행복하지 않지?’라고 고민하며 타인의 인생과 비교할 필요가 전혀 없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고통 속에 사는 것이다. 오히려 행복한 순간들은 ‘부자연스러운 순간’임을 인정해야한다. 다만 마음속에서 행복을 찾을 수는 있다. 인생 자체가 투쟁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그게 좀 쉬워지는 것 같다. 나 역시도 노력중이고, 저런 어디서 들은 말에 내 생각을 덧붙인 거다.

그래서 많이 벌면서도 남을 돕지 않는 어른들을 보면 별로 멋있어 보이지 않는다. 누구를 돕는 것이 현대시민의 ‘의무’는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직관력의 중요성을 모르는 어른 같아 보여서다. 그냥 나랑 가치관이 안 맞는 거지, 

내일 모레 카드 값이 걱정이고 주말에 무슨 돈을 이리 썼나 한숨이 절로 나오는 월요일이었다. 하지만 오늘 하루도 주어진 일이 있음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작년 여름 할머니 얘기로 시집도 냈고, 또 여기에 할머니 이야길 언급했지만 할머니는 내 글을 읽어보실 수 없다. 돌아가셨고- 돌아가시기 전에도 한글을 모르시던 분이었으니까. 

그래서 조금 전엔 70대 노인 분들에게 컴퓨터를 가르쳐주는 복지관에 커피 한잔을 기부했다. 20대에 배우고 싶은 게 많았던 나처럼, 어르신들께서도 배움을 통해 새로운 내일을 기대하며 잠자리에 드셨으면 좋겠어서. 

오늘 글로 인하여 조금이나마 아름다운 사회가 만들어지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러려고 내가 열심히 일하는 구나!’라는 기분이 물씬 들게 만드는 모닝기부를 강력 추천한다. 기부 목록에서 그날그날의 감사함이 기록되는 멋진 경험도 해보시길 바란다. 거기에 아직 용기가 부족하시다면 날 많이 응원해주셨으면 좋겠다, 피자 한판씩 내는 사람이 어서 되라고-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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