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술년 한해 화려한 이목구비를 뽐내던 존덕정 옆...

[공감신문] 정환선 칼럼니스트=무술년 한해 화려한 이목구비를 뽐내던 존덕정 옆 샛노란 은행나무 이파리가 존덕지로의 마지막 비행을 하면서 창덕궁 겨울 서정은 시작된다. 다큐멘터리 속 주인공 솔부엉이가 여름내 새끼들을 품어 키워냈던 벌거숭이 회화나무 구멍 속 둥지의 보금자리는 주인이 떠난 지 이미 오래다. 전각과 후원의 나무와 식물들이 맹추위에 잠시 숨을 죽이고 있다. 낙선재는 휑하니 겨울 삭풍에 온기가 사라져 버린 지 오래고, 사람들 손을 타지 않고 남겨진 서리맞은 새빨간 홍시는 몸뚱이를 배고픈 겨울새들에게 까치밥으로 내어주고 있다.

#. 낙선재와 함박눈 덮인 감나무 촬영 : 궁궐길라잡이 이한복

궁궐을 관람하는 사람들은 어느 시기에 궁궐에 오면 제일 아름다운 경치를 즐길 수 있는지에 대하여 관심이 많다. 궁궐은 계절별로 아름다운 경치의 특징을 갖고 있어 어느 때든지 좋다. 봄에는 성정각 자시문 앞 만첩홍매화, 낙선재 승화루 뒤편 수령이 150∼200년 돌배나무의 화사한 꽃잔치, 여름에는 전각 위로 쏟아지는 비가 기와를 타고 흘러 떨어지는 물소리, 관람지와 존덕정 주위의 가을 단풍들의 향연, 낙선재 앞 찬서리에 농익어 빨갛게 고운 자태를 들어내 관람객들을 맞이하는 연시 등등이 전각들과 어울려 만들어 내는 경치가 멋들어진다. 겨울에는 궁궐 안 가득히 쏟아지는 함박눈, 전각 추녀 끝에 매달린 고드름, 낙선재 앞 까치밥 홍시 등이 눈을 즐겁게 하고 카메라 셔터 누르기를 재촉한다.

#. 함박눈 속의 낙선재와 상랑정 촬영 : 궁궐 길라잡이 이한복

궁궐의 겨울 풍경 스케치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함박눈 쌓인 전각과 후원의 경치다. 최근 온난화 현상인지 몰라도 함박눈 쌓인 궁궐을 만나기가 그리 쉽지 않다. 함박눈은 굵고 탐스럽게 내리는 솜 모양의 눈으로 약간 포근한 날에 내려 눈사람을 만들거나 눈싸움하기에 좋은 눈이다. 기상예보에 촉각을 세우고 함박눈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돈화문이 열리자마자 제일 먼저 입궐하여 눈 쌓인 풍경을 즐기고 카메라에 담아 평생 두고도 잊지 못할 추억거리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눈 내리는 날이면 창덕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은 능허정에 오르기를 좋아하는 임금들이 많이 있었다. 이곳에 오르면 저절로 시인이 되어 능허정 주위의 눈 내리는 경치를 뚝딱 시로 지어 남겼다. ‘홍재전서’에는 정조 임금이 정자 주위에 내리는 눈경치를 읊은 “능허모설”이 전해오고 있다. 함박눈 덮인 궁궐의 경치를 관람하는 관람객들 역시 시인이 저절로 될 수밖에 없다.

#. 함박눈 쌓인 성정각과 자시문 앞의 매화나무촬영 : 궁궐길라잡이 이 한복

대전 중궁전 떠난 지 오랜 겨울 궁궐 송이눈 가득하다.
낙선재 앞 감나무 나뭇가지 함박눈 떨구기에 부산하고
새들이 쪼아댄 홍시 구멍 깊이만큼 겨울 여정 짧아져 간다.

매서운 맹추위에 겨울 궁궐 속살 훤히 내비쳐 보이고.
굴근눈 뒤집어쓴 자시문 밖 만첩홍매화 꽃망울 송골송골
솜눈 모자 쓴 떨켜들의 기해년 새 봄맞이 준비 분주하다.
                                                        
함박눈 속의 ‘창덕궁’ 겨울 서정    - 시 : 정환선 -

함박눈이 내린 후 궁궐은 적당한 추위와 햇볕을 받아들여 전각 처마 밑으로 고드름을 내려 키운다. 이런 날 낙선재 뒤편에 가면 가까이서 눈으로 즐기고 손으로 만지며 고드름을 접하면서 겨울 서정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동절기 안전사고 우려로 출입이 일시 제한된 옥류천의 고드름 커튼도 아주 좋은 눈요깃감이다.
눈 쏟아지는 날 궁궐 관람에는 카메라가 필수다. 이런 날은 카메라 초점을 어디에 맞추어도 한 폭의 동양화이자 추억거리 만들기에 딱이다. 전각 네 부분의 귀틀 아래에서 부식을 막기 위해 끼운 토수가 있는 ‘추녀’와 추녀 옆에서 중도리의 교차점을 중심으로 하여 부챗살 모양으로 배치한 서까래 ‘선자연’을 아래에서 올려보며 셔터를 누르는 멋도 있지만 전각들의 전면에서 눈 덮인 ‘추녀마루’와 처마의 고드름을 카메라에 담는 즐거움도 있다.

#. 옥류천의 소요암 겨울 얼음폭포 촬영 : 궁궐길라잡이 차동희

“낙선재”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가족이자 주인이었던 이방자 여사와 덕혜옹주가 1989년 세상을 등져버려 지금은 텅 비어버린 전각이지만 그분들 생전 겨울나기에 20여 명의 직원이 온종일 연탄에만 매달려 레일식 아궁이의 방에 하루 세 번씩 연탄을 갈아 매월 3000장의 연탄이 들어갔다는 어느 봉사자의 이야기가 새롭다. 지금의 ‘낙선재’는 함박눈 쏟아지는 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함을 잃지 않으면서 제자리를 지키며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함박눈 내리는 날은 날씨가 참 포근하다. ‘눈 오는 날 거지가 빨래한다.’라는 속담이 있다. 거지가 빨래할 정도의 이런 날은 느리게 걸으면서 경치 구경과 수다, 힐링의 여유를 즐기면서 카메라에 담아두는 것도 좋으리라. 그리고 언젠가는 능허정에 올라 궁궐 전체와 멀리는 한양의 안산인 남산자락까지 눈 세계를 즐길 수 있는 기회가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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