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지해수 칼럼니스트=언어에는 문화가 담겨있다. 말에선 그 사람이 드러난다. 우리는 대화를 통해 상대방을 파악할 수 있다. 스스로 드러내고자 하는 자신- 그 이면異面의 타자를 알고 싶어 하는 건 동물적인 본능이다. 동물들은 눈빛과 호흡, 경직된 어깨와 걸음걸이로 상대방의 심리를 쉽게 파악한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은 개체들끼리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사냥감이 되어버리는 동물들은 어릴 적부터 맹수의 냄새를 안다. 

우리에게도 물론 이러한 습성이 내제되어 있다.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비언어야말로 최고의 언어이기도 한 셈이다. 그래서 일까? 때로 우리는 들키고 싶지 않은 자신을 가리기 위하여 언어를 사용할 때도 있다. 

굶주린 사자, 루소
굶주린 사자, 루소

내가 좀 그런 것 같다. 정말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다. 다만- 대화중에 ‘왜 나는 저 사람에게 반감이 들까’ 혹은 부정적인 감정이 생길까(...) 궁금했다.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하는 몇 가지 부류 중 하나는,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이다. 

그날의 기분이나 날씨, 혹은 음식이나 음악, 영화에 극단적인 표현은 나도 많이 쓴다. 내가 부정적으로 느끼는 건 어떤 사람(자신 혹은 타자)의 성향에 대해 극단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이다. 어떤 사람에 대해 이야기할 때, ‘절대’, ‘진짜’, ‘아예’, ‘정말’ 같은 부사를 쓰는 게 싫다. 쓰지 말라고 권하는 게 아니다. 개인적으로 싫다는 거다.

아무렇게나 하는 말은 상관없지만 아무 말은 싫다. ‘난 절대 안 그래’, ‘걘 진짜 잘 해’, ‘넌 아예 몰라’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자주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겐 ‘타인을 타인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습성이 있다고 느꼈다. 타인이 타인임을 인정하는 것? 그건 단지 ‘너는 너’ ‘나는 나’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타인이 변화할 수 있는 주체임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타인을 성숙한 타자로 존중해주는 태도다. 

피카소가 20살에 그린 ‘자화상’
피카소가 20살에 그린 ‘자화상’
피카소가 25살에 그린 ‘자화상’
피카소가 25살에 그린 ‘자화상’

‘절대’ 안 그러는 사람은 없다. ‘아예’, ‘진짜’ 잘하기만 하는 사람도 없다. 하지만 이런 표현을 자주 쓰는 사람들은 머릿속에서 대상자가 자신이 아는 ‘진짜’, ‘아예’ 그런 사람으로 박제한다. 심지어 제 3자에게 자신이 아는 그에 대해, 이런 극단적인 표현을 써서 말하기도 한다. 개인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내가 그런 대상자가 되었을 때, 꽤 기분이 유쾌하진 않았다. 

연인관계에서 그렇게 말하는 커플을 본 적이 있다. 친구의 남자친구가 친구에게 그런 표현을 많이 썼었다. 그가 생각하는 그녀는 진짜 ‘무엇무엇-’한 사람이었다. 나는 내가 보지 못한 ‘무엇무엇’한 그녀의 모습들이 당연히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중에 그녀는 이 문제로 답답하다며 나에게 고민을 털어놓았었다. 연인관계엔 이러기가 더 쉬웠다. 그는 그녀에게 반했던 환상대로 그녀에게 ‘무엇무엇’한 사람이라고 자꾸만 이야기했던 거다. 

나는 타자와 관계 맺는 과정이란 끊임없는 투쟁이라 생각한다. 이런 가까울수록, 사랑할수록 필요하다. 시끄러운 싸움만이 투쟁이 아니다, 이 투쟁이 긴- 장기전이므로 오히려 힘을 빼는 게 나을 지도. 부모와 자식관계를 생각하면 쉽다. 떨어져 지내지 않는 이상, 부모와 자식 사이엔 언쟁이 있기 쉽다. 무조건적으로 부모 말에 복종하는- 자식 말에 꿈뻑 죽는 부모들이 아닌 이상 이러지 않나 싶다. 부모들은 자식을, 자식은 부모를 사랑한다. 위에서 언급한 내 친구의 남자친구보다 훨씬 큰 사랑으로! 그렇다면 부모들이 기대하는 자식은 오죽하겠는가. 

심지어 자신의 몸에서 나온 자식이니 ‘무엇무엇’한 것들에 대해 꽤나 구체적인 편이다. 그러니 자식들은 부모와 투쟁한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끊임없이 부모에게 말하는 것이다. 쉽지 않은 과정이다.

피카소가 85살에 그린 '자화상'
피카소가 85살에 그린 '자화상'

상대방에 대한 자신의 느낌이나 생각을 가지는 것이 뭐가 대수롭겠는가. 하지만 그것을 고착화시켜버리면, 결국 상처받는 것은 자신임을 알려주고 싶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머릿속에 박제시켜놓은 상대방이 조금 다른 모습을 보이면 이질감을 느끼거나, 심지어 상처도 받는다. 왜 상처 받는가? 상대방을 성숙한 타인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변화무쌍한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며, 지속적으로 변화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사람에 대해 ‘진짜’, ‘절대’와 같은 표현을 자주 쓰는 이들에게 좀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나보다. 아마 최근 몇 년 사이에 생긴 감정인 것 같다. 나는 다소 즉흥적으로 행동하고 기분파인 편이다. 맞다, 애 같은 거다. 낯선 내 모습에 상처받은 것처럼 표정 짓는 이들이, 나는 버거웠다. 왜 나는 그들에게 작은 죄책감을 느껴야하지? 왜 그들은 나의 변화를 인정하지 않을까? 때문에 나를 극단적인 표현으로 단정 지으려는 부류들과 멀리하게 된 것이다.

두 개의 자화상, 키르히너
두 개의 자화상, 키르히너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지내는 건 투쟁에 가까운 일이기에, 사랑할수록 기나긴 투쟁이기에 정말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스스로와의 관계를 잘 개척해나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며, 지금 내 옆에 있는 이들과도 투쟁인데 또 누군가와 관계를 맺겠는가.

‘남녀관계’에 있어서도 내 생각은 그러하다. 변화하는 과정이 자꾸만 궁금해지는, 또 그런 과정을 지속할 사람을 만나야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몸과 마음의 변화가 부끄럽고도, 또 상대방의 변화가 궁금해지는 그런 사춘기 소년소녀 같은 호기심까진 아닐지라도! 서로의 변화가 줄곧 흥미롭고 응원해줄 수 있어야하지 않을까. 투쟁을 줄이기 위해선, 가까이에서 변화의 과정을 보이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 역시 한번 ‘극단적으로’ 말해 보자면- ‘절대는 절대’ 없다. 절대 그런 건 없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나에겐 없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말하는 나는 이미 거기에만 있고, 여기엔 없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모를 사람 속을 가진 상대방을 인정하는 것- 쉽지 않지만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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