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지해수 칼럼니스트=얼마 전 길을 걷다 우연히 생전 처음 보는 단어가 발길을 잡았다. ‘장수사진’. 어느 노인 모델 분의 차분한 표정이 담겨있었다. 그건 이전에 내가, 또는 우리가 ‘영정사진’이라 부르던 형태의 사진이었다. 혹은- 한 눈에 보아도 그런 목적으로 쓰일 것 같은 사진이었다. 

영정사진, 아마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분들은 찍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영정사진 촬영은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행위 중 하나다. 아니, 사실 옛말처럼 ‘가는 데는 순서가 없으나’(...) 우린 대부분 죽음을 대비하지 않으며 살아간다. 그건 어찌 보면 당연하기도 한 것 같다.

잘 살아가는 것에도, 내일을 준비하는 것에도 우린 너무 많은 감정과 에너지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죽음’이 언제나 가까이에 있다는 인식이 절실히 필요해보이기도 하다. 아마 이전보다 지금의 세대가, 그리고 앞으로 더욱 그렇게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작품의 제목이 삶과 죽음이 아닌, 죽음과 삶인 것이 인상 깊다.?= 죽음과 삶 구스타브 클림트
작품의 제목이 삶과 죽음이 아닌, 죽음과 삶인 것이 인상 깊다. = '죽음과 삶' 구스타브 클림트

오늘날 ‘죽음’에 대한 인식과 간격을, 가장 비교하기 좋은 시대는 중세다. 중세 시대에는 인간보다 신이 앞서있었고, 인간이 만든 모든 것 위에 신이 존재하였다. (물론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는 의견도 있으나, 이 글에선 거기까지 논하진 않겠다) 중세시대의 신은 경외하고 또 경외해야 할- 가장 두려운 대상이었다. 그렇기에 ‘죽음’은, 지금처럼 그리 두려워할 사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슬퍼할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망자(亡子)의 입장에서는 신의 곁으로 가는 행위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서양 중세의 느낌으로 말하는 것이다. 아마 이렇게 쿨 하진 않았을 테지만, 살아생전 친절한 이웃이자 친구였던 그는, 하나님의 품으로- 그러니까 ‘천국’에 갔다고 믿었을 거다. 

과거 인류는, 질병에 대해 이런 식으로 접근하기까지 했다. 물론 의학 기술이 발달되지 않았기에 유행하는 전염병 등을 치료할 시도조차 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삶과 죽음이 모두 신의 영역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바이러스는 바이러스가 아니라 ‘악마’가 씌인 거였다. 몰살을 당하는 땅에 사는 이들은 신에게 벌을 받는 것이라 생각했다. 당시엔 술, 담배, 정크 푸드, 과로를 달고 살지 않은, 매우 어린 아이라도 전염병에 바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Plague' Arnold B?cklin
'Plague' Arnold Böcklin

이런 안타까운 죽음이 매우 많아서일까? 그들은 사후 세계가 있다고 더 믿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사후 세계나 영적인 영역에 대한 그림을 매우 많이 남긴 것도 어쩌면, 떠나보낸 이의 대한 그리움일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현대는 어떠한가. 오늘날 사회는 죽음을 저 멀리 두려고, 아니 두라고 한다. 당장 내일 죽는다면 당신은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직장에 출근하거나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겠는가. 이 질문 자체가 매우 터무니없는 것을 안다. 그래도 ‘한 그루의 나무를 심겠다’는 마음을 가진 이들도 분명 존재할 테지, 하지만 현대인들에게 ‘직업’은 ‘사명감’보다는 생계유지 및 사회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시켜주는 수단인 경우가 훨씬 많다. 

현대인들에겐 ‘죽음’이 저 문 밖 멀리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지금의 사회가 원활하게 돌아가기 쉽다. 심지어 ‘오늘’뿐만 아니라, ‘내일’이 온다는 두려움을 자꾸만 선사해야 한다. ‘내일의 먹거리’, ‘내일의 쉴 곳’(...) 내일 다가올 질병에 대한 치료비... 내일을 함께할 내 옆에 이웃들이 다 쓰는 모호한 어떤 물건들... 모든 것들에 대비해야만 한다. 그래서 현대의 노인들은 ‘영정사진’이 아닌 ‘장수사진’을 찍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영정, 그러니까 요즘말로 장수사진은 ‘남겨진 이들’을 위한 사진이다. 사진 속 주인공이 세상을 떠난 후, 그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두고두고 가장 많이 기억할 모습이다. 그렇기에 나는 ‘장수사진’이라는 말이 좀 아이러니 하다는 생각이다.

우리 사회는 고령화를 넘어 ‘초 고령화’에 진입한 지 오래다. 초등학교엔 아이들이 없어, 학교들은 소규모 통폐합을 하고 있다. 지금의 청년은 물론, 청년의 청년들은 노인의 노인들, 노인들의 노인들을 부양해야할 의무가 짊어질 것이다. 이렇게 ‘초 고령화’가 사회적 부담으로 느껴지는 오늘날, ‘영정사진’의 부정적 이미지를 대체하려 만든 ‘장수사진’이라는 말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냐는 거다.

일단 ‘장수’라는 단어 자체가 그 생기를 잃었다고 생각한다. 과거, 장수하는 노인들에게 ‘천수를 누린다’고 표현하였다. 하늘이 주신 복으로 여겼다. 하지만 의학 기술이 발달한 현대엔 그렇지 않다. 예기치 않은 사고... 또는 마음의 사고, 그러한 후유증, 신체적 희귀병 등이 아니면 대부분은 이전보다 장수할 수 있게 된 거다. 

오래 사는 것보다 ‘건강하게’, 그리고 ‘잘 사는 것’이 훨씬 중요해졌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라는 옛말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노인들은 급기야 개똥밭보다는 저 세상이 낫겟다는 생각도 하나보다. 영화<죽여주는 여자>를 보면 그러한 노인들의 심경이 잘 그려져 있다. 이 영화의 노인들은 중세 시대의 사람들처럼 ‘사후세계’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어서, 이 삶으로부터 회피하고 싶어한다. 

현대의 장년층은, 죽음을 준비하지 않고 ‘삶’을 준비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건강도, 재산도, 친구도, 가족 관계도 모두 괜찮아서 ‘60부터’ 펼쳐진 또 다른 삶이 여유로운 보상같이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현실 속, 우리 장년층의 대다수는 외롭거나 쪼들린다. 심지어 많은 이들은 가난하다. 그래도 그들에겐 펼쳐진 내일이, 삶이 있다. 내일을 준비해야 하는 삶이다. 

'김치(KIMCHI), 2011' 중에서?
'김치(KIMCHI), 2011' 중에서 

‘장수사진’이라는 말이 ‘PC운동(Politic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의 일환이라는 자료를 보았다. PC운동의 취지와 그러한 움직임은 매우 멋진 일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다양성을 인정하는 PC운동처럼, 개개인의 의견도 다양할 수 있는 법. 나는 여기에서 발생한 몇 가지 단어에는 거부감이 든다. 

영정사진은 영정사진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대인들도 죽음을 준비하여야 한다. 죽음을 가까이에 둔 삶이야 말로, 어쩌면 더욱 주체적인 모습일지 모른다. 죽음을 준비하는 자세야 말로 더욱 삶을 삶답게 살게 할 것이다.

죽음을 가까이에 두면, ‘내일’이 두렵기에 남을 쫓지 않아도 된다. 오늘을 누릴 이유가 충분히 있다. 신에게 감사할 이유가 생기고, 나를 사랑하는 이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죽음에 대한 준비는 이제 단순히 ‘나이 많은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내일만 보고 사는 청년들이 어쩌면 더 많이 죽고 있는 지도 모른다. 우리는 삶과 죽음을, 동시에 두려워하고 대비해야 한다.

여유로운 낮 시간에 내 어깨까지 뻐근하게 만든 단어, 장수사진... 생각해보니까 전날 밤에 ‘귀농’의 이면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감상한 탓도 큰 것 같다. 과연 나는 잘 늙을 수 있을까. 돈만 많이 벌어두면 노후가 행복할까? 그건 아닌 것 같다. 물론 가난한 것보단 여유 있는 노후가 훨씬 안정적일 것일 테지만... 그땐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은 필요하기도 하지만, 어쩌면 필요 없기도 하다. 세상은 무지 빨리 변하고,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은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했지?’, ‘오늘 나를 불편하게 만든 것은 뭐지?’를 성찰하는 게 더욱 잘 사는 방법이 아닐는지.

장수보다야 (잘)잘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영정사진도 장수사진도 아닌 셀카를 찍으면서 후회 없는 하루하루를 살고 싶은 마음이 더욱 격해지는 밤이다. 

저작권자 © 공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