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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신문 지해수 칼럼] 위로받지 못할 자

지해수 칼럼 | 기사입력 2018/06/15 [09:35]

[공감신문 지해수 칼럼] 위로받지 못할 자

지해수 칼럼 | 입력 : 2018/06/15 [09:35]

[공감신문] 헬조선 루저 모쏠 흙수저 나레기– 스스로의 삶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통변해주는 듯한 단어들이다. 이런 신조어들의 전체적 이미지는? 비참함이다.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은데 그 작은 소망이 ‘짓밟히고 있어요’라는 이미지가 강렬하다. 그러나 이전에도 대부분 모든 시간을 친절한 적이 없었더라는 세상의 성격을 보노라면, 차라리 스스로 바뀌는 것이 빠르지 않겠나 싶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수양하며 내 몫이나 잘 해내자며 살고 있다. 그런데 가끔 타인 때문에 불쾌감을 느낀다. 위로를 원하는 그들 때문에 심하게는 나의 심적 고요가 강제로 추행을 당한다는 기분마저 든다.

 

=프리다 칼로 <상처 입은 사슴>

누구나 타인과 관계 맺고 상호 간 작용하며 살아간다. 사람 사이에 스트레스가 없을 리 없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불쾌감은 여기서 비롯된 게 아니다. 어쩌면 내 직업이 ‘작가’이기에 따라 붙는 불편함인지도 모르겠다.

 

작가라는 직업을 택하게 된 몇 가지 이유 중 하나는, 혼자를 만끽해도 된다는 거였다. 혼자 있는 걸 좋아한다. 그래야 타인과 있을 때에도 더 나다울 수 있다고 느낀다. 장시간 사람들과 있고 나면 하루 정도는 혼자 시간을 보내려 한다. 성향이 이렇다보니 사람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몇 년 동안 얼굴을 본 적 없는 친구는 물론이거니와 오빠 언니들까지 나에게 전화를 걸면 한 시간을 넘게 통화를 한다. 그 중에선 나보다 10살 넘게 더 많은 분들도 있다. 그들은 내게 말 못할 고민을 털어놓는다. 연애, 인간관계, 진로, 우울감, 심지어는 내가 해본적도 없는 결혼 생활에 대해서도 상담한다.

 

물론 나는 그 사람이 아니기에 머리로 이해할 뿐, 깊이 공감할 수 없다. 그랬다면- 그건 거짓말일 거다. 명쾌한 해답을 준 적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제 3자 입장에서, 남들보다 말을 조금 더 잘할 수 있는 내가, 여러 가지 철학/심리학에 관련된 잡다한 지식을 재료삼아 이야기하면 그들은 나에게 ‘역시 넌 뭐가 다르다’라고 한다. 그런 말을 들으면 좋지 않냐고? 글쎄.

 

나의 말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된다는 건 스스로도 감사한 일이지만, 가끔은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걸 당연시하게 여기는 건 섭섭한 일이다. 심지어 몇 년 만에, 스스로가 답답함을 못 이겨 전화해서는 지친 나를 붙잡고 한 두 시간씩 늘어진다. 난 쉬고 싶은 기분이 들거나, 혼자만의 고요한 시간을- 또는 어느 행복한 상상에 잠겨 있다가도 그들의 전화에,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의 이기적인 태도에 기분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내 그릇이 작아서인지도 모른다. 그들의 이기적인 태도에 나의 감정은 강제로 추행을 당하는 기분이 든다, 정말이다.

 

친한 사이라면 없는 시간을 내어서라도 위로를 건네고 싶을 거다. 하지만 나에게 씁쓸함을 느끼게 하는 저이들은 나의 ‘지인’이다. 오히려 일면식이 없는 사람보다 못할 때가 많다. 가끔 이메일을 보내는 독자들이 계신다. 감상평은 물론, 고민 글도 꽤 있다. 그들은 내가 어느 질문에 성심껏 답변을 하면 그것을 상당히 고맙게 여겨준다. 나라도 누가 나의 고민을 듣고 진심으로 생각해서 답장을 주면 그럴 것 같다. 그런데 나의 지인들은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를 가지는 게 아닌가.

 

물론 내가 유독 잘 상담해줄 거라고 느낄 수 있는 것들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오랜만에 연락을 해야 한다면, 오랜만에 밥이라도 한 끼 하자고 할 것 같다. 지인들에게 밥을 못 얻어먹어 이러는 게 아니다. 중요한 건 마음이다. 띡- 전화를 걸어 그렇게 나를 괴롭힐 일인가. 그들은 그러고서도 한동안 편해지면 연락하지 않는다. 모르긴 몰라도 기도를 받는 하나님의 심정을 천만분의 일-정도 알 것 같다. 나는 일문일답 즉문즉답을 해주는 스님도 아니고, 정신과 의사도 아니다. 어디 가서 전문적인 상담을 받으시길 바란다.

 

나는 그들이 어쩜 이렇게 뻔뻔할까, 생각했다. 그건 ‘서비스’를 노동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서비스에 대한 개념도 한몫할거라 생각한다. 무언가 재화를 제공한다, 는 개념은 확실히 알면서, ‘서비스’라는 것엔 개념이 모호한 사람들인 거다.

 

가끔 우리나라 피부과 진료가 신기하다는 이들이 있다. 미국의 경우, 여드름으로 병원에 가면 연고와 먹는 약을 처방이 많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렇게 간단한 진료에는 환자가 ‘돈’을 쓰려하지 않는다고 여긴다. 병원에서는 이런 저런 시술을 권유한다. 결국 소비자들 스스로 피부과 진료를 비싸게 만드는 결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어떤 이들은 나에게 A4 100페이지가 넘어가는 시나리오나 작업물, 소설 등을 이메일로 보내서 읽고 코멘트를 달라고도 한다. 서로 모니터를 해주던 사이라면 상관없겠지만 나로서는 그 자체가 큰 숙제고 부담이다. 아마 다른 분야에 계시는 분들도 마찬가지일 거다. 패션센스가 남다른 이들은 그만큼 옷을 사보고, 입어보고, 관심을 가지고 시간을 쏟아본 사람들이다. 그런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MD나 스타일리스트가 되기도 한다. 그런 감각의 친구에게 함께 쇼핑을 가줄래- 라고 할 때는, 적어도 그의 센스가 거저 얻은 것이 아니며 누군가는 이런 친구의 감각을 돈을 주고 사용한다는 걸 알아야한단 거다.

 

=프리다 칼로 <내 치마가 저기 걸려있다>

하루 이틀 이런 일을 본 게 아니면서도 갑자기 글을 쓰게 된 건, 어느 날 다시 연락이 온 지인의 한마디였다. 내가 자신에게 고민 상담을 하지 않으니 나는 고민이 없는 줄 알았다는 거다. 갑자기 ‘너는 좋겠다-’며, ‘너는 문제없고 알아서 잘 하잖아. 해탈 했잖아’라는 이야길 듣고는 할 말을 잃었다. 난 이제 겨우 서른. 20대들이 보기엔 언니, 누나 같아 보일지 모르겠지만 나도 사회초년생인데 고민이 없을 리가. 세상이 만만치 않고 무서운 건 똑같은 걸.

 

자신의 약점을 보여준다는 건 대단히 사랑스러운 행위일지 모른다. 이전에 내가 사랑했던 누군가가 나에게 자신의 약점을 보여주었을 때 고마움마저 느꼈다. 그건 나를 믿는다는 표현이기도 했다. 서로가 그래도 된다고 느낄 때, 우린 동시에 서로의 치부를 드러냈던 것 같다. 그건 본능적으로 알아챌 수 있다.

 

고민에 빠진 누군가는 아마 본인 이외에 아무도 보이지 않을 거다. ‘나’라는 사람의 이기심이 누군가의 기분을 상하게 했더라는 것도 모를 것이다. 그들에게 이것을 알려주어야겠다는 의지는 없다.

 

=프리다 칼로 <우주와 대지와 나와 디에고와 세뇨르 홀로틀의 사랑의 포옹>

다만, 나 역시 누군가에게 본의 아니게 상처를 입힌 적이 없는 지 기억을 더듬어볼 뿐이다. 위로받지 못할 자가 된다는 건 절대 반가운 일이 아니지 않나. 혼자만의 시간을 충분히 감내해야 누군가들과 있을 때 더욱 나다운 것처럼, 진짜 위로를 받아야 누군가에게 제대로 된 위로를 주는 사람이 된다. 그러니 ‘넌 알아서 잘하잖아’라는 헐거운 위로는 다 지나가는 늦봄의 꼬리에 묶어 보내길 잘한 것 같다. 위로가 절실한 우리 삶에서, 진심을 가슴으로 느끼는 분위기가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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