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지 못하였다.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가, 나비가 꿈에 장자가 된 것인가?’

– (장자<제물론(齊物論)>중 ‘호접지몽’에서)

 

※ 이 글은 영화<버닝>(2018)의 줄거리를 인용,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공감신문] 어떤 학자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가장 수려한 글솜씨를 가졌다고 이름난 두 인물 맹자와 장자가, ‘동일 인물’이라고. 그들은 매우 상반된 성격의 철학을 펼쳤다. 두 사람의 출생-사망년도가 3년 차이로 비슷하게 추정되는데, 이들이 서로의 존재를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에 대한 언급이 단 한번도 없었다는 점에서 그런 ‘환상적인’ 주장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정말 둘은 같은 사람이었을까? 뭐, 진실은 아무도 모르지. 그런데 얼마 전 영화<버닝>을 보며, 혹 저들이 한 사람이었다면- 마치 벤(스티븐연 분) 같은 성격이지 않았을까 싶었다. 아니, 벤- 이렇게 동양적인 오빠라니!

‘개츠비’들에 대한 나의 열등감? 그런 것이 나에게 존재하는 지 몰랐다. 종수(유아인 분)도 처음엔 몰랐겠지. 하지만 보는 내내 내 속에 있던 구름들이 스멀스멀- 거대하게 뭉쳐져 얼어붙었고 아랫배가 막 아플 정도더라. 그래도 제목답게- 마지막엔 불태워버려 주어 고마웠다. 그렇게 녹아내리고…. 또 구름들을 생성하러 밖을 나서야 했지만.

사실 ‘벤’같은 겉모습의 오빠들은 내 주변에도 많다. 한국말을 서투르게 쓰고, 영어를 하며, 좋은 집에 살고, 외제차를 몰고, 친구들과 ‘저녁이 있는 삶’을 즐기는 사람들. 인자한 성품 옆에- 보란듯이 화려함을 치장하기도 하지. 그런 것들이 해미(전종서 분)같은 아이의 욕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니까.

맹자왈- 무릇 인간에겐 이 네 가지가 있어야 하는데… 인(仁), 다른 사람을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 의(義), 사회에서 통용되는 상식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을 때 부끄러움을 느끼는 마음. 예(禮), 겸손하고 남을 공경하며, 사양할 줄 아는 태도. 지(智), 옳고 그른 것을 아는 것이다. 그러면서 맹자는 인간은 본디 마음이 선하게 태어났다며, 성선설을 주장했다.

겉보기에 벤은 인의예지를 다 갖춘 사람이다. 그는 돈이 있고 없음으로 사람을 주눅들게 하거나 차별 대우하지 않았다. 조카에게 좋은 삼촌, 부모님에게 좋은 아들로 비춰졌다. 버려진 불쌍한 생명을 거두기도 하고, 음식을 나누는 걸 행복해하는 사람이었다. 여기에 ‘해외파’스러움이 물씬 드러나는 몸에 베인 자연스러운 매너까지. 맹자의 어머니가 교육을 위해 이사를 다녔던 것처럼, 그만큼의 사랑과 지원을 받고 자란 티가 폴폴 나는 사람이었다. ‘제가 받고 자란 사랑을 나누어 줄게요, 함께 할래요? 제 속엔 악이 없어요-‘라는 듯. 때론 불편함까지 자아내는, 백치미스러운 천진함까지.

그러나 벤의 이중성이 드러난다. 그는 음식을 만들며 ‘나’에게 바칠 제물을 만드는 거라 했다. 여기에 해미는 불편해하지 않는다. 자기도 그런 사람이니까(…)

그날 파주에 떠오른 노을은- 진심을 노출시키는 노을이었다. 변모하는 그것은 벤을 대마초 피우고 싶게 만들었다. 그는 ‘장자스러움’을 노골적으로 끄집어내며 비닐하우스 이야길한다. 우리 아빠는 분노조절 장애가 있어요. 난 해미를 사랑한다고 씨발, 종수는 말했다. 해미는 옷을 다 벗고 삶의 의미를 찾는 ‘그레이트 헝거’ 춤을 춘다. 죽는 건 무서우니까, 노을처럼 사라지고 싶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이 정도라면 벤의 제물이 되기 충분치 아니한가.

‘해미는 사라졌어요, 연기처럼.’

영화를 보신 분들이라면 열린 결말이더라도, 나처럼 벤이 해미를 죽였을 거라 생각하실 거다(난 그렇다). 아니, 연기로 만든 거다. 장자는 모든 것을 ‘기氣’라고 생각했다. 기가 모여 형체가 된다고. 그래서 장자는 부인이 죽었을 때에도 잠시 슬퍼하다가 질그릇을 치며 노래를 불렀고, 자신의 장례도 잘 치룰 필요가 없다고 했다. 어차피 형체만 없어질 뿐 어디에도 존재할 테니까.

장자의 제물(齊物)론에 꿈 이야기가 나온다. 그가 꿈에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 기뻐했는데, 깨어보니 자신이 장자가 되었다고. 그래서 장자의 꿈에 장자가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의 꿈에 나비가 장자가 된 것인지 모르겠다고. 이 영화에서도 ‘나비’가 나온다.

‘그럼 내가… 고양이가 없단 사실만 잊으면 되는 거야?’

벤의 집을 나간 고양이를, 여자가 ‘나비야~’하고 부른다. 이전에 고양이들이 나비를 쫓아다니는 모양새를 보고 이렇게 불리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나비야, 나비야… 그러던 종수가 고양이에게, ‘보일아-‘한다. 존재 유무가 확실치 않던, 보일이. 그런 고양이가 종수 품에 폭- 안긴다. 그럼 나비가 보일이인건가- 보일이가 나비인건가- 보일이가 좇는 나비는 해미인건가- 해미 춤은 날갯짓이었나- 해미는 보일이었나…

해미는 맛있는 귤을 스스로에게 제물하기 위하여 판토마임이라는 방법을 쓴다. 벤 역시 그러하다. 자신에게 해미를 제물offering하기 위하여 제물qiwu한 것이다. 변화무쌍한 노을을 보며 그레이트 헝거 춤을 추는 해미, 종수에게 우물 이야기로 혼란을 주는 해미, 그리고 ‘비닐 하우스’를 태운다 말하는 종수. 두 사람이 다를 게 뭐란 말인가? 오히려 이방인은 종수였다. 장자는 부도지도(不道之道), 도에는 방법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방법 같은 방법’만을 생각한 종수가 어찌 이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겠어?

장자의 철학은 ‘체험의 철학’이라고들 한다. 머리로 배우는 게 아니라 느껴야하는 거라고. 그래, 벤의 말처럼 가슴에서- 뼛속까지 울리는 베이스! 그걸 느껴야지. 해미와 벤은 아프리카에서 그런 것들을 배워왔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벤의 융단같이 안락한 맹자스러움은- 그 속에 장자스러움이 들어찼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벤이 즐기는 것들은 다 제대로 사라지기 위하여 태어난 것들로 보인다. 음식, 대마초, 음악도 이 다음 음으로 흘러가야- 음악이 된다. 비닐하우스- 그리고 해미. 그렇게 마구 연기처럼 없앨 수 있었기에, 사회 속에서 도덕성과 매너, 인자함을 장착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지금 벤 오빠도- 파주에도 있고, 나이로비에도 있고, 반포에도 있는 거지요. 종수가 남산타워를 보며 해미 생각으로 자위를 했던 것처럼.

인간은 누구나 이중성을 가진다. 아니, 사실 두드러지는 것이 두가지 정도일 뿐 더 많은 내가 존재할 거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런 베이스의 울림을 견딜 수 없는 성격들이 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 그러니 너를 연기처럼 흐르게 할 수 밖에. 대신 네가 ‘재미있는 것’이라면 기꺼이 그 냄새를 맡을게.

과연 보여지는 것은 전부가 아니었다. 느껴야 한다. 미술 작품도 휴대폰으로 보지 말고 직접 가서, 그 앞에서 숨을 쉬어야 한다. 작가의 영혼이 그 그림에도 있을 테니까. 해미가 노을을 바라보며 추었던 그레이트 헝거의 춤처럼- 우리가 출 수 있는 춤이란 과연 그런 데에 있는 게 아닐까. 보이는 것만 볼 줄 아는 사람은 평생 리틀 헝거의 춤 밖에 출 수 없을 것이다. 이번 주말, 극장에 가서 장자스러운 시선으로 다시 이 영화를 볼 것이다.

(모든 이미지 영화<버닝>, 출처 메인 예고편 및 접속 무비월드)

저작권자 © 공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