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지해수 칼럼니스트=공교롭게도(?) 어린 시절 나는 꽤 쑥스러움이 많은 아이였다. 아마 지금의 나를 만난 많은 사람들이, ‘네가?’라는 반응을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진짜다. 어떤 것들은 너무 감추고 싶어서, 그것 대신 다른 것들을 매우- 드러내는 것일지 모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이 그리로 향하며, 그에 따라 판단할 것이기에... 어쨌든 나도 그랬었다.

<트럼펫>, 장 미쉘 바스키아 / 1984

나는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특히나, 이런 것들을 잘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꼭 전달하고 싶던 것들이 있었고, 그럴 때엔 편지를 잘 썼었다. 차라리 글로 전달하는 게 편했다. 나는 어떤 면에선 공감 능력이 매우 뛰어나서, 누군가와 의견 충돌이 있거나 설득해야 되는 상황에서 그것을 포기해버리고 만다. 상대방의 설득에 논리와 전혀 무관하게- 그저 감정적으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편지는 굉장히 일방적인 표현 도구다. 편지를 받아든 누군가는 일단 이것을 작성한 내 정성을 알기에, 나의 의견을 대하는 애티튜드가 달라진다. 내가 이것을 작성한 만큼은 아닐 지라도, 최대한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는 알려고 한다. 같은 길이의 글이라도, 한 줄 띄고 한 줄로 적혀진 카톡과 다르다. 진짜 편지이자, 메시지인 것이다. (물론 요즘엔 카톡으로도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곤 한다. 카톡이 활발하지 않을 때에 나는 이메일로도 이런 편지들을 종종 보냈었다)

그렇게 꽤 예의바른 청중이 된 그는, 아마 내 편지를 읽으며 중간 중간 반박하고 싶은 순간이 한 두 번이 아닐지 모른다. 혹은 오해를 풀고 싶기도 했을 거다. 또는 나의 이마에 입 맞추고는 내 감정에 동조해주고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편지는 이렇게 일방적이다.

<잠자는 집시>, 앙리루소 / 1987

최근 손 편지를 적었던 것은 저번 주였다. 약간 술에 취해서 써내려간 글이고, 우편으로 보냈어서 정확한 내용 외에 기억나는 게 별로 없다. 취했다고도 썼고, 거기엔 대부분 내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고마움에 대해 취해서 춤추듯 넘실거린 글이라... 받은 이는 매우 좋아하였고 한 잔이 땡긴다고 했다.

편지에 대해 다시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건, 얼마 전 서랍 정리를 하다 발견한 어느 엽서 때문이었다. 그 엽서 뒤엔 누군가가 빼곡하게 적어 내려간 글이 있었다. 편지였다. 그 편지를 나에게 준 사람은 남자였고, 그 남자애는 나를 좋아했었다. 나는 다시금 그 편지를 읽으며, 너무- 생경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부르고 있는 것은 분명 내 이름이었는데, 내 얘기가 아닌 것만 같았다. 이런 생각을 하다니, 너무 나쁘다.

하지만 진짜다. 그 엽서에서 불리는 나는 매우 사랑받는 여자 같았다. 솔직히 그 자체도, 매우 생경하다. 물론 나도 과거에 연애를 하면서 세상 부럽지 않게 큰 사랑을 느껴본 적이 있지만, 그건 너무 예전이라...

근데 내가 방금 말한 과거사와, 그 엽서 속에 등장인물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즉, 나는 엽서를 준 남자애와 그렇게 열렬했던 적이 없었더라는 것이다. 내가 ‘세상 부럽지 않게 사랑을 받았다’고 한 것은, 그 사랑을 준 이가 나에게 매우 커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근데 엽서의 주인공은 아니었다.

나는 혼자 술을 마시기도 좋아하고, 약간 취해서 글 쓰는 것도 좋아한다. 내가 작년에 출간했던 시집의 시들은 대부분 취해서 나온 것들이 많다... 여기엔 당연히 사랑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과거의 누군가- 혹은 지금 만나고 있는, 지금 만나고 싶은, 지금 떠나야 할 누군가에 대한 기록이다. 근데 엽서 속 그 애는 거기에서 주인공이었던 적이 없다고- 나는 알고 있다. 그래서 글은, 진짜다. 기록해야만 한다.

<붉은 방> 앙리 마티스 / 1908

보르헤스는 인간의 위대함을 이야기하며 ‘책’에 대해 극찬했다. 인간이 만든 매우 많은 것들 중에- 책이야말로 인간을 위대하게 만들어준다고 했다. 음악이나 춤은 현실을 잊게 하는 것이랬다. 근데 글은, 과거라는 방대한 환상을 들여다보게 한다. 다가올 미래처럼, 어차피 모호한 것들이다. 하지만 글은, 기록된 그 시간에서 죽은 것이다. 그게 끝이다. 말처럼 살아서 움직이지 않는다. 그게 말과 글의 차이다.

기록된 인간들은 그 글 속에 죽어있지만, 절대 불변으로 고정되어 거기에 살아있다. 글 속에서 그들은 성장하지 않고 거기에 멈춰있는 것이다. 이제 와서 엽서 속 남자애가 나에게 그저 호감이었어, 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진짜 그 때 그 애의 감정은 아직 편지 속에 남아있더라는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메모장, 일기장, 노트 여기저기 쓰인 내 감정들을- 잊고 있던 나의 고민들과 씁쓸함 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들이 아직 거기에 잘 살고 있구나- 하며 만날 때마다 매우 반가운 기분이다... 가끔, ‘넌 누구니?’할 때도 있지만.

인간들은 기억을 왜곡하여 저장하는 데 달인들이다. 그게 우리를 살게 했다. 그런 기술마저 없었더라면 우리 모두가 알베르 카뮈처럼 허무주의자가 되어서 <시지프의 신화>같은 것만 읽고 있을 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것도 당연히 알아야한다. 이 세상이 왜 존재하는 지,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지, 왜 이렇게 사는 지 궁금해 하지 않는다면- 허무함을 알지 못한다면 당신은 진짜 ‘소중한 느낌’을 알 수 없을 확률이 클 테니까.

<기억의 왜곡> 살바도르 달리

같은 세계와 현실도 누군가가 보느냐에 따라 이처럼 관점이 달라질 수 있듯,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대로 살아가게 된다. 살아지는 것일지, 살아가는 것일지는 본인이 정한다. 자신이 어떤 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지, 우리는 글을 쓰며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쓰는 행위’를 비효율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다. 최대한 줄이고 간편하고 경제적인 소통을 원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 위하여 쓰는 행위는- 혹은 한 사람을 위하여 쓰인 것들이... 굳이 경제적일 필요가 있을까. 오히려 미래에 그것을 받아든 나는, 너무 성의 없는 과거의 나에게 섭섭함을 드러낼 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 어떻게 늙어가고 있는 지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다. 왜곡된 셀카 만이, ‘내가 이렇게 살았구나’ 기록의 전부는 아니다. 일상을 살아가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미워하는, 당신이... 기록하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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